네스프레소에 대한 단상 ☕

스프레소만 있으면
타벅스 갈 필요 없이
렌치프레스도 필요 없이
쓰비보다 간편하게
파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원두커피를 집에서 만드려면 온갖 수고를 들여야했다. 인터넷에서 원두를 구매한 뒤, 입자 굵기에 신경 써 그라인더로 갈아주고, 전문 쇼핑몰에서 구매한 도구로 몇 분간 정성들여 추출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고소한 커피 한 잔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음료를 굉장히 빨리 마시기에, 커피를 마시는 시간보다 만드는 시간이 더 긴 주객전도의 상황도 자주 일어났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의식이 일종의 놀이처럼 느껴졌었고, 무엇보다 코를 즐겁게 하는 아로마 가득한 결과물을 보면 그깟 몇 분간의 추출이 전혀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직장에 다니기 전까지는 그랬다. 평일과 주말 모두 각각의 이유로 바쁜 인생이 (어쩌다) 되어버린 요즈음, 인정하긴 싫지만 편하게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자라나곤 한다. 좋아하는 걸 하더라도, 취미를 즐기더라도, 좀 편하게 좀 해보자! 만날 회사다니면서 고생하는데 조금 편하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귀찮음에 굴복한 대가로 한정된 시간에 더 많은 걸 하겠다는 파우스트적 교환의 영역을 조금씩 더 늘리다보니, 결국은 그렇게 좋아하던 원두커피마저도 인스턴트 커피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커피콩 가득한 종이봉투 대신 맥심 인스턴트 플라스틱병이 놓여져 있던 우리 주방에 원두커피가 다시 돌아온 것은 지난 주였다. 한 경품 이벤트에서 네스프레소 C30 커피머신에 당첨된 것이다. 대학교 교과서만한 사이즈의 앙증맞은 커피 머신이지만 에스프레소와 룽고를 순식간에 뽑을 수 있다고 한다. 캡슐커피 머신이 나온지 퍽 오래된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초 만에 물이 커피로 바뀌는 모습을 보니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본 것 마냥 신기하였다.

네스프레소 에센자 미니 C30

집에서 버튼 한 번에 고소한 커피를 먹을 수 있다니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 기분을 타고 잠시 인근 백화점에 들려 네스프레소 캡슐을 잔뜩 구매하였다. 마침 55,000원 이상 구매시 11,000원을 할인해주는 행사를 하였기에 예상보다 많은 양을 구매하였다. 캡슐 80개면 적어도 두 달은 넉넉히 버틸 수 있다. 출근 전이던, 게임 한판 할 때던, 기름진 점심식사 뒤던, 집에서 원하는 순간에 언제든지 편하게 커피를 먹을 수 있다는 약속에 지갑이 스스럼없이 열린 것 같다.

하지만 뜨거운 커피가 식어가며 맛이 바뀌듯이, 어제 저녁부터는 설렘은 줄어들고 네스프레소에 대한 약간의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우선, 내가 편하게 네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즐기는데 낭비된 많은 자원이 마음에 캥긴다. 이 커피 한 잔을 먹기 위해선 최소한 원두커피를 만드는데 수반되는 에너지 – 커피를 수확하여, 대한민국의 로스터리까지 옮기고, 커피콩을 볶은 뒤 다시 내 집 앞까지 옮긴 뒤 추출하는 — 에 더해서, 커피의 캡슐화와 캡슐을 배송하고 판매하는데 수반되는 에너지가 추가로 든다. 알루미늄 캡슐은 재활용된다지만, 세척에 필요한 수자원 낭비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네스프레소의 성장이 동네 카페 사장님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시기상조적) 걱정도 든다. 네스프레소 커피 한 잔의 가격은, 기계값을 제외한다면, 약 690원이다. 690원에 집에서 고급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세상에 동네 카페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이 무기가 되어야할까? 커피 맛보다는 인테리어와 분위기에 집중하는 것이 네스프레소를 상대하는 방법이겠다.

만약 네스프레소가 성장해 지금보더 더욱 폭넓게 보급된다면, 미래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마치 유난 떠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뜨끔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독자에게 말한다. 라떼는 말이야…